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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페란토와 문화, 풍토

에스페란토는 독자적인, 즉 아프리오리 문화와 풍토가 없습니다.
국제보조어라는 사정을 생각하면 문화와 풍토의 차이를 명료하게 하기보다는 표백하는 편이 효율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애당초 에스페란토인이라는 민족이 어딘가 특정 지역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에스페란토에 풍토는 없습니다.
또 에스페란토 네이티브의 큰 집단이 특정 지역에 살면서 특수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문화도 없습니다.

예술언어인 인공언어에서는 톨킨의 ‘반지의 제왕’과 같이 가공의 풍토와 문화를 만드는 경우가 있지만 에스페란토는 그러지 않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에스페란토는 고유의 아프리오리 문화・풍토를 갖지 않습니다.

에스페란토의 문화와 풍토는 주로 서양의 것으로서 우리 일본인과는 다른 감각을 갖고 있습니다. 아래에 실례를 들겠습니다.
에스페란토에서는 형제에 장유의 구별이 없으며 자매는 둘 다 fratino입니다.
또 대명사도 ‘그’와 ‘그녀’를 나타내는 것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영어와 많이 닮았죠? 모두 일본어에는 없는 특징입니다.

아버지는 patro라고 합니다. 어머니는 여성을 나타내는 -in-이라는 접중사를 더해서 patrino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부모’를 나타낼 때는 patro로 대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남자가 무표가 되는 것은 영어의 man 등과 같은 발상입니다.
물론 이것은 여러 다른 언어에서도 그렇기 때문에 방증으로는 약하지만요.

보다 좋은 방증은 lupo(늑대)입니다.
이것은 형용사가 되면 lupa(늑대의)라는 뜻이 되는데, 동시에 ‘잔인한’이라는 뜻도 갖습니다.
그림 동화 등에서도 볼 수 있듯이 늑대의 이미지는 ‘잔인함’입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늑대가 ‘大神’로도 통하는 것으로 보아 반드시 ‘잔인’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고고함’등을 상징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一匹狼’와 같은 단어에 남아 있습니다.

만약 일본의 에스페란티스토가 lupa라고 말하면 그것은 고고함의 의도일지도 모릅니다.
당연히 서양인은 ‘lupa에 고고함이라는 뜻은 없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서까지 우리들은 에스페란토를 국제보조어로 인정할 수 있을까요.
이처럼 어디까지나 lupa는 서양 문화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또 akvo는 ‘물(水)’이지만 동시에 ‘뜨거운 물(湯)’이기도 합니다. akvo라고 해서 일본인이 ‘水’인 줄 알고 만졌더니 실제로는 ‘湯’이었다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한국어의 물은 차갑기도 하고 뜨겁기도 하기 때문에 이 점에 관해서 한국인은 위화감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인은 느낍니다.
어느 나라 사람인지에 따라 위화감을 느끼기도 하고 느끼지 않기도 하는 것은 국제보조어로서 괜찮은 것인가 하는 비판이 있습니다.

여담이지만 필자는 한국의 산길에서 차가 고장났을 때 로드서비스가 올 동안 우리끼리 어떻게 해결해 보자며, 무슨 생각에서인지 엔진에 물을 넣기로 했습니다.
필자는 차 옆에 있는 용기에 손을 대어도 될지 망설였습니다. 그 용기는 주전자였기 때문에 뜨거운 물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용기가 주전자박에 없어서 물을 담았는지도 모릅니다.
찬물인지 뜨거운 물인지 모르고 실험삼아 만졌다가 데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물어보기로 했습니다. 이것은 ‘물’인지 물어봤더니 상대방이 그렇다고 하기에 ‘아, 만져도 되겠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역시 주전자밖에 없어서 물을 담은 거구나. 이런 산길에서 물을 끓일 리도 없고’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직후에 동승자가 엔진에 ‘물’을 붓자 엄청난 김이! ……큰일 날 뻔했습니다. 그 산길은 경주 근처의 절에 가는 길이었기 때문에 근처 매점에서 뜨거운 물을 빌려온 듯했습니다.
귀국 후에 ‘물’은 뜨거운 것도 가리킨다는 것을 알고 ‘어법 무서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어법이 제대로 설정되지 않은 인공언어로 제대로 의사소통할 수는 없겠다고 실감했습니다.


그런데 에스페란토는 국제보조어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서양에 경도되어 있다는 사실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온갖 문화에 대응하는 언어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
벼와 쌀을 구별하면 일본을 편애하게 되고, 구별하지 않으면 서양을 편애하게 됩니다. 어느 쪽이건 불평등해서 국제보조어로서는 비판받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국제보조어이므로 각 사용자가 각자의 문화를 배경으로 말해도 된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요?
일본인은 제멋대로 akvo에 차가운 이미지를 갖고, 영국인은 제멋대로 lupa에 잔인함을 상기합니다. 이래서는 오해가 끊이지 않아 의사소통이 성립되지 않겠지요.

그럼 반대로 특정 문화를 채용하면 어떨까요? 예를 들어 에스페란토가 서양 문화를 공식적으로 채용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렇게 되면 이번에는 ‘국제보조어이면서 왜 서양 중심이냐’는 비판을 받게 됩니다.
이 모순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에스페란토에 한하지 않고 국제보조어를 하는 사람들은 이 문제 자체를 외면하는 경향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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